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노버 왕조 (문단 편집) == 영국 왕위 획득과 [[동군연합]] 통치 == 선제후 작위를 받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다음 2대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폰 하노버'(게오르크 1세)가 1714년 영국 왕실 왕위에 당첨(?)되어 [[조지 1세]]로 즉위하며 영국의 통치 가문이 되었다. 현재의 [[찰스 3세]]도 하노버 왕가의 후손이 된다. [[세계사]] 과목에서는 이때부터 영국 국왕의 비중은 거의 없고 대신 토리당, 휘그당, 총리 이름 등을 외우게 된다. 1714년 [[스튜어트 왕조]]의 [[앤 여왕]]이 죽으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단절된다.[* 사실 아직 [[자코바이트]] 운동을 일으키던 [[제임스 2세]]의 후손들이 있었지만 앤 여왕 시기에 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가톨릭 신자는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마저도 손자 2명이 아들없이 사망하여 1780년대에 혈통이 끊겼다.] 그 남은 [[친척]]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을 왕으로 모셔오게 되었는데 가까운 혈통이라는 게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인 '''[[팔츠의 조피]]'''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제임스 1세는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엘리자베스 공주]]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1618년 보헤미아 개신교 귀족들의 왕위 제의를 덜컥 받아들여서 [[30년 전쟁]]의 원인이 된 사람.]에게 시집보냈었는데, 그녀가 바로 조피 선제후비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이미 앤 여왕보다도 훨씬 고령이었던 조피가 만 84세로 앤 여왕보다 2개월 먼저 사망함에 따라, 그 아들인 [[조지 1세]]가 영국의 추정상속인이 되어 하노버 왕조를 개창했다. 조지 1세는 그냥 외손자도 아니고 조지 1세 기준으로 보면 외가의 외가였다.[* 어머니는 비텔스바흐 가문, 외할머니가 스튜어트 가문] [[앤 여왕]]과는 촌수로 6촌이니 조선 [[철종(조선)|철종]]과 [[고종(대한제국)|고종]]처럼 아주 먼 친척은 아니다.[* 입양을 통한 종법상으로는 7촌이고(철종은 은언군의 손자, 고종은 은언군과 형제인 은신군의 증손자) 실제 혈통 기준으로는 17촌이다.(철종은 효종의 7대손, 고종은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8대손)] 문제는 조지 1세는 혈통만 [[제임스 1세]]의 후손이지, 완전 '[[독일인]]'이었고, 갑작스레 영국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한참 오랫동안 고국인 [[하노버 선제후국]]을 지배하고 있던 군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영어 한마디도 할 줄을 몰랐고 결국 믿을 만한 오른팔을 만들어 수상으로 임명하는 정치를 시행했다. 이때 초대 총리로 20년 넘게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로버트 월폴]]. 덕분에 그는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독일어]]만 하고 [[영어]]를 못해서 국정을 내팽겨쳤다는 흔히 알려진 [[먼나라 이웃나라]]의 설명은 당시 유럽의 공용어가 [[프랑스어]]임을 부연설명하지 않고 농담으로 넘어간 것으로, 신하들과 의사 소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조지 1세는 오십 평생을 독일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 왕정이 그렇듯 신하들이 궁전에 들어와서 알현하는 독일식 궁정 통치에 익숙해서 '''무엄하게 왕이 신하들 만나러 출근하러 가는 영국의 의회 제도라는 요상한(?)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대리인 겸 연락책 신하를 보낸 것.~~솔직히 애들 보는 만화에서 정치 얘기를 복잡하게 하는 것보단 말이 안통해서라고 하는 쪽이 낫긴 하다~~ 이 무렵 [[프랑스어]]의 다른 이름이 국제어('''Lingua Franca''')이며, 그 어원 역시 당시 세계공용어였던 프랑스어에서 기원했다. [[스웨덴 국왕]] [[칼 13세]]의 양자로 간 [[칼 14세 요한|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도 [[프랑스어]]를 [[스웨덴]] 귀족들도 다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고[* 만약 그가 라틴어가 국제 공용어인 중세 유럽이나 영어가 국제 공용어인 현대 유럽의 인물이었다면 본인이 각각 라틴어와 영어를 잘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스웨덴인]]에게 자국 군주 취급도 못 받았을 것이다.] [[러시아 제국]] 궁정에서도 [[프랑스어]] 못하면 야만인 취급했다.[* 오히려 [[러시아어]]를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나폴레옹이 쳐들어오자 '''러시아의 [[높으신 분들]]이 [[프랑스인]]으로 오인받아 민중들, 병사들에게 맞아죽을까 봐'''(...) 속성 러시아어 교육을 받았다.] 또한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도 논문이나 저작은 프랑스어로만 작성할 정도로 유럽 상류층에선 프랑스어가 보편화되었다. [[민주주의]] 국가 [[미국]]만 봐도 20세기 초반까지 상류층에서 별로 실용성이 없는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배우며 그들만의 리그의 장벽으로 삼았다.[* 그리스어는 잘 모르겠지만, 라틴어와 프랑스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국 상류층 대상의 네임드 사립학교에서 여전히 'Liberal Arts'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다.] 이러한 풍조는 사실상 20세기 초중엽까지 계속되다가, 양차대전으로 영불 등 구 열강들이 몰락하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미국의 '영어패권주의' 와 소련의 '러시아어패권주의' 앞에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영어]]의 발상지인 [[영국]]은 [[어부지리|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그래도 아직 [[FIFA]] 등에서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다수의 [[프랑코포니]] 국가가 존재하는 등, 프랑스어의 위상은 결코 낮지 않다. 또한 [[정치]] 참여를 아예 안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조지 1세]]와 [[조지 2세]] 등의 군주들은 태생부터가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국보다는 독일 내 하노버 영토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였다.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국의 군주로서 [[대북방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공을 세워 하노버의 영토를 넓히는 등 하노버의 국력을 신장시킨 명군주였다. 하지만 증손자인 [[조지 3세]] 이후에는 영국에서 태어난 왕들이 즉위하면서 점점 하노버는 [[찬밥]]으로 취급되었다.--[[대영제국]]을 다스리는데 독일 북부의 작은 나라 따위...-- [[하노버 왕국|하노버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국가]] 중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다음 가는 크기[* 하지만 인구는 [[작센 선제후국]]이 더 많았다.]였으며 때문에 독일 내에서도 그 규모는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노버 선제후국과 영국과는 군주가 동일한 것이지 별개의 주권 국가였으며, 정치 시스템 역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국법도 다르고 의회도 달랐다. 영국이 입헌군주였던 것처럼 하노버 선제후국에서도 별도의 내각이 존재했다. 다만 명예혁명 이후 국왕의 권력이 제한되었던 영국에 비해 하노버에서는 군주의 직접적인 권한이 훨씬 강했고, 조지 1세나 조지 2세는 직접적인 통치권이 강했던 하노버에서의 통치에 더 큰 흥미를 보였다. 또한 바다로 둘러싸인 영국과 달리 유럽 한복판에 위치하여 다른 나라들과 접해 국경을 형성했던 하노버 선제후국은 주변국들과 영토 싸움이 활발했고, 특히 당시 [[프로이센 왕국]]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서부 독일로까지 야금야금 영토를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 선제후국은 이에 치열하게 대응해야 했다. 하노버 선제후국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7년 전쟁에선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조지 1세의 딸이자 조지 2세의 여동생의 아들인 데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내는 브라운슈바이크-베버른 가문으로 역시 하노버 왕가와는 [[벨프 가문]]의 후계로서 친척 집안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비롯한 유럽 대륙 내의 각종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전쟁의 결과는 하노버의 영토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 섬나라로써 다른 나라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영국보다 정세가 급박한 하노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18세기 이후 [[대영제국]]의 힘이 강성해졌고, [[독일어권]]에서도 [[프로이센 왕국]]의 힘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다른 [[영방국가]]들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하노버 왕조의 왕들 역시 독일의 하노버에서 태어나기는커녕 제대로 하노버 땅을 방문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았고, 점차 하노버보다는 영국에 관심을 기울였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하노버 선제후국은 잠깐 나폴레옹에게 망해서 하노버 궁정의 독일계 신하들과 군인들은 국왕폐하가 계시는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고, 영국은 이들을 토대로 [[왕립 독일인 군단]]을 만들어 나폴레옹 전쟁에 보내기도 했다. [[빈 회의]] 결과 하노버 가문(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은 친척지간이던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텔 공작령과 분리되어 서로 분가하고[* 그래서 탄생한게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하노버 선제후령은 교회령과 기타 [[듣보잡]] 소국을 합병하면서 영토도 확장하고 왕국으로 격상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